사방 100리에 배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가족과 함께 경주 여행!

 

경주 최씨부자의 가훈입니다.

 

 

 경주여행의 시작은  교동으로 부터 시작해도 좋습니다.

 

  경주IC를 나와 5분 거리이고 경주역에서도 가까운 거리이다. 

경주터미널하고도 가까울 뿐더러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기엔 딱 알맞습니다.

 

 경주에 오면 신라시대의 유물과 첨성대 그리고 고분 등 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신 젊은(??) 조선시대의 경주 최씨부자의 삶이 녹아져 있는

 최씨부자고택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왕과 그들의 삶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피부로 와 닿지는 않는다. 

허나 최씨부자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브리제는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내가 부자라서 느끼는게 많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

 

(경주에 오면 늘 한나라(신라)에 대해서만 보고 가는데 교동에 오면  최부자집의 인간적인 그리고 한사람으로서의 살아온 품격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럼 부자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멋진 차와 집  즉 의식주 그리고??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만 할 것이지 부자가 된다면

 무었을 할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해 본적은 적을 것입니다.

 

  이사람 .

경주 최씨부자는 부자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려 줍니다.

 

만수르(맨시티 구단주. 30조의 자산가 오일왕) 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경주 최씨 부자가 부러운 것이죠.

 

경북 경주시 교동(校洞)에 있는 만석꾼 경주최씨의 고가옥.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자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경주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자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

최부자집에서 전해오는 전통은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다. 또한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며느리는 3년동안 무명옷을 입고 사방 100리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했다. 최부자집의 1년 쌀 생산량은 약 3천 석이었는데 1천 석은 사용하고, 1천 석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천 석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사랑채에서 엿새동안 머물면서 최준(崔浚 1884~1970)에게 문파(汶坡)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였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게되었고 3만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에게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해방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자금이 한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전 재산은 교육사업에 뜻을 둔 최준의 뜻에 따라 대구대학교(영남대학교 전신) 재단에 기부하였다.

   현재의 가옥은 170여 년 전의 건축으로, 그 평면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건물재목들도 일반가옥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재목을 썼을 뿐 아니라, 건축물 자체의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었다.
 
이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969년의 화재로 사랑채 ·행랑 ·새사랑채와 그 남쪽에 달린 바깥 변소 등이 소실되었고, 문간채 ·고방 ·안채 ·사당 ·뒤주가 남아있다. 특히 뒤주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쌀 800석을 보관할 수 있었다. 이런 뒤주(쌀창고)가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1971년 5월 26일 중요민속자료 제27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인용문헌 : 두산백과사전 네이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60529&cid=40942&categoryId=33080

 

 

 

 

 

과연 최진사 부자는 삶이 어떠했을까? 

들어가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멋진 말입니다." 주변 100리에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400년 역사 속에서 마을인심을 잃지 않고 살아 간다는게 말이나 될련지..........

 마치 유태인의 성경 탈무드에서나 나올듯한 이야기 입니다.

 늘 바르게 살고 인심을 써도 질투와 시기가 따르는 법

 이를 어떻게 잘 해쳐 나갔는지 궁금합니다.

 그의 처세술이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그 시대야  현세보다 사회가 더욱 혼탁하여

 많은 공직 부조리로 부자의 땅을 빼앗을 려고 

두눈을 부릅뜨고 있었을 텐데... 대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정주영 회장이 청문회에 나와서 했던말이 생각납니다. " 달라는데로 다 주었습니다. 말단공무원 부터 청와대 까지 다 주었습니다. 아파트도  관련자들에게 하나씪 다 주었습니다. "  라고 했던말이 기억이 납니다. 우리나라 습성상 부자라면 어떻게든  뜯어 먹으려고 물고 늘어졌을텐데 그분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물론 주었겠지요?

(또 다른 부자들의 시샘에는 어떻게 대처 했을지도 궁금합니다).

 


 

 

 

 

 

 

 

 

 

창고 앞에 가훈이 적혀 있습니다.

 

육연

자처초연(自處超然·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대인애연(對人靄然·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무사징연(無事澄然·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진다)

유사감연(有事敢然·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득의담연(得意淡然·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실의태연(失意泰然·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육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

 

 

위글을 읽고 우리집 이제 가장은 나와 아내와 

우리도 이제부터 가훈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가 좋을 까요?

 

위 내용처럼 멋있지 않아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우리가족 모두가 존엄한 인간으로써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갈수 있도록 하여

 힘들고 어려울때 나침반이 되어 이끌어 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문고리에 끼워저 있는 나무막대기  잠금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일터 막대기가 참 잘 어울립니다.>

 

 

 

 

 

 

 

최진사 부자집을 나와 교촌마을을 둘러 보는데요.

 이곳은 원효대사가 다녀가 길로도 유명하더군요.

 

 

 

 

 

<마치 칸트의 길 처럼 우리나라에도 이런길을 만들려고 하나 봅니다. 다음에 오면 자전거를 빌려 구도의 길을 가봐야 겠습니다.>

 

 

 

      사진에는 월정교가 그리 커보이지 않지만 막상 다가가 보면 웅대합니다.

 멀리서 보면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나

 미국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아 보이는데 

가까이 가보면 그 둘 보다 훤신 훤신 멋집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지붕이 있는 다리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아직 완공은 안되었는데도 웅장을 뽐내고 있습니다.

 완공이 언제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완공이 되면

 다시금 와서 원효대사와 공주가 사랑을 나누었던 이곳에 다시 오고 싶습니다.

 

 

 

 

 

 

 

 

교촌마을을 돌다보니 경주계림길이 나오네요. 

제가 길치라 그런지 알고보니 첨성대하고도 아주 가까운곳이 였습니다.

 계림길로 10분정도 걸어 가면 첨성대와 릉을 볼 수 있습니다.

(속으로 아 여기가 거기구나.. )

 

 

 

 

 

 

 

    

      교촌마을 홍보관입니다 

이곳에서 10짜리 영상물이 있는데 영상은

 셀프라 자기가 영상관에 들어가서 버튼을 누루고 영상물을 봐야 합니다.

 영물내용은 최부자집의 이야기를 풀어논 것인데

공공기관에서 만든 영상물 중에 가장 가장 재미있고 유익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꼭 가셔서 아이들과 보기를 강강추 합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뭔지를 느끼게 합니다. 잘 왔다는 생각이 절실히...^^*

 

 

 

 

 

  허나 아이들을 데리고 많으 걷는다는 것은 금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벤치에 앉더니만 그냥 누워 버립니다. 다리가 아파서 못일어 난다고 하네요..

 

 

이 뒤로는 아빠의 어깨가 분지러 듯하게 업고 목마 태우고 다녔습니다. (아직도 목덜미가 아프네요) 두녀석을 번갈아서 태우니라고......

여행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여행핵심

교촌마을(최씨부자집, 요석궁,교리김밥, 교촌법주, 향토체험,월정사 )- 계림길- 첨성대(그 주변으로 관광할께 많아요) - 보문단지(말씀 안드려도 볼께 많지요..) 

 1박2일 코스로 좋습니다.

 

 

 

Posted by 세남자 세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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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장지기 2014.03.05 1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열분 정도만 더 게셔도 이 사회는 좀더 따뜻해질텐데..

  2. 런치쇼 2014.03.05 12: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경주에 또 가보고싶네요...

  3. 수니 2014.03.05 13: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주가면 나도 여기 꼭 가야지~~

  4. singenv 2014.03.05 18: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주 최씨 잘 알죠~
    일제시대 이회영 일가도 생각나네요~

  5. 세남자 세친구 2014.03.05 1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합니다. 웹으로 찾아 봐야 겠어요... 역사에 문외한이라... 이회영일가...요.그분도 훌륭하신 분이시죠..?

  6. 봄날 2014.03.05 19: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이 있는 포스팅 감상 잘 하고 있습니다.
    차가운 날씨에 따뜻하게 잘 챙기시고 건강속에서 행복하세요^^

  7. 늙은 호텔리어 몽돌 2014.03.05 23: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 경주 최부자의 자손 중 한분이 저의 선배로 같이 근무하다 경주힐튼 총지배인으로 6,7년 계셨나?
    과로로 재작년에 퇴임을 했었더랬지요. 그분의 부친은 경주에서 도가를 하셨다더군요.
    그나저나 교촌하니 교촌치킨이 갑자기 생각나는데 아마도 이곳의 이름을 딴듯 하군요.
    귀여운 아이들 얼굴을 좀 보여주시지는~ㅎ

  8. 지후대디 2014.03.07 12: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말씀대로 우리나라에도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었네요 멋진 가풍가진 집안인것 같습니다 ^^

  9. 목늬공방 2014.03.12 20: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경주 여행은 몇번이나 갔었는데
    여기는 또 처음 보네요. ㅋ 감사한 포스팅 잘 봤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10. @@  2014.04.01 11: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들에게 진정 훌륭한 여행이됬겠어요! ^^
    우리나라는 졸부들이 너무많아 부자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안좋은편인데
    과거의 저렇게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를 아이들이 보고 배우며
    멋진 어른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네요